중국인학살피해자에 대한 조사는 일본 정부가 아니라 王兆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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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학살피해자에 대한 조사는 일본 정부가 아니라 王兆澄이었다.
  • 김종수
  • 승인 2022.10.03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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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8. 독립기념과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일민족문제학회 공동주최
- -山河慟哭 특별호 원제 : 東瀛慘案

해방후 일본 관동대지진 한*중 양국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활동과 그 전망

<이 글은 지난 2018년 8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한일민족문제학회가 공동주최한 국제학술심포지움에서 정러징(鄭樂靜) 닝보대학(寧波大學) 교수의 글 일부분을 게재함, 이 글의 게재 이유는 방송사와 인터뷰 중 중국인 학살피해자를 일본정부가 조사하여 750명의 명단을 중국정부에 넘겨주었다고 한 필자의 인터뷰내용에 대하여 사실과 다름을 알려준 쿠와노야수오씨 덕분에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연구자의 글과 중국인학살피해역사를 조사한 분들의 자료집을 발췌하여 오류를 바로 잡고자 한다.>

1923년 9월 1일 관동지역에서 진도 7.9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해 10여만 명의 사상 자와 실종자를 냈다. 도쿄와 요코하마 두 지역 대부분의 건축물이 젯더미로 변하였고, 그 참상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지진 소식은 중국에까지 전해졌으며, 각계 인사들은 즉시 의연금을 모금하는 등 원조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北洋政府는 9월 3일 특별각 료회의를 열어 20만 원의 의연금 지원을 결의하고, 구제 물품을 실은 상선을 일본에 파견하 였다. 동시에 중국 각지에서는 각종 구제단체가 설립되어 의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저장성 남부에서도 甌海道屬日灾救濟會를 조직하고 의연금과 물자를 모집해 일본 구제 활동을 벌 였다. 이 밖에도 중국적십자회의 구호의료대가 9월 8일 일본에 도착해 난민구제에 참여하였다.

중국 내에서 활발한 구제 활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군국주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군대, 경찰, . 자경단(일본 민간의 재향군인, 소방단, 청년단 등으로 조성됨) 등이 대지 진 후의 혼란을 틈타 700여 명의 무장하지 않은 재일 중국인 노동자 및 중국인 노동자단체 中華民國僑日共濟會 회장 王希天을 살해하였다. 참안 발생 후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은폐로 이 때의 역사는 반세기 가깝도록 묻혀 있 었다. 1975년 학살이 이루어질 때 龜戶지역에서 근무하던 陸軍野戰重炮兵第一連隊 久保野茂次의 일기가 <每日新闻>에 실리면서 왕시텐 학살의 진상이 드러났으며, 중국인노 동자학살사건 또한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중일 양국의 소수 학자와 민간 몇몇 인사를 제외하면 이 사건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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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인학살사건 지진 발생 후 조선인에 의한 방화, 독살, 폭동 등의 유언비어가 돌자 일본 정부는 9월 2일 계엄령을 발포하였다. 군대와 경찰 외에 일반 시민이 조직한 자경단에게 협조를 부탁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도록 했다. 하지만 일본군대, 경찰, 자경단은 지진 후의 혼란을 틈타 수백 명에 달하는 중국인 노동 자, 상인, 유학생 등을 살해하였다. 중국사에서는 이를 '동영참안(東瀛惨案)'이라 부른다. 동 영참안은 도쿄 근교와 요코하마 일대에서 일어난 중국인학살사건을 말한다. . 관련된 사건으로 1.大島町事件 2.神奈川중국인학살사건 3.王希天事件 4.중국인유학생 구타사건을 꼽을 수 있다. 학살 중 피해를 본 대부분은 저장성 남부지역 출신의 노동자들로 그 수는 약 700여 명에 달하며, 수십 명의 山東 : 江蘇, 福建 . 廣東에서 온 상인, 수공업자들도 피해를 입었다. 학살은 9월 2일과 3일 발생하였다. 도쿄지역의 학살은 대부분 오시마마치, 砂町 . 가메이도마치 와 같은 중국인 노동자 집거지에서 발생했으며, 가나가와(神奈川) 현의 학살은 요코하마(横 浜)시 子安町, 神明町, 高島町에서 발생한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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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20년대 진상조사 상황 중국인학살사건이 발생한 후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이 중대한 중일 간 외교 문제로 비화 될 것을 우려하여 관련 신문 보도를 엄격히 차단하였다." 9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재난으로 손 실을 입은 중국인 노동자의 귀국이 이어짐에 따라 대학살의 진상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에 중국 내 여론이 일시에 들끓었고, 본래 진재 구제 위주였던 상하이 신문들의 보도는 심지어 일본신문까지 전대미문의 잔악한 중국인학살사건에 대한 보도로 전환되었다. 중국 각계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일본 정부에 계속해서 항의교섭을 요구하였다. 가장 먼저 진상조사를 시작한 것은 공제회 총무부장 王兆澄, 温處灾僑 代表, 온주여호동향회(溫州旅程同鄉會,o) 하'동향회' 약칭), 歐海道尹 등 민간인과 민간인들이 조직한 단체였다. 사건의 중대함, 명확 한 증거, 여론의 악화 등이 베이양 정부를 압박하자, 베이양 정부도 王正廷을 위수로 하는 조사단을 일본에 파견하기로 했다.

1) 온주여호동향회(溫州旅漾同鄉會)의 활동

왕자오청은 왕시텐의 실종 후 그의 소재와 피해 상황을 추적하였으나, · 일본 정부가 백방으 로 이를 저지하면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중 중국인 노동자의 귀국선에 몸을 숨겨 일본 경찰의 감시를 따돌리고 상하이로 돌아왔다. 배가 상하이에 상륙하자. 왕자오청 은 그 즉시 중국인 노동자 사상자의 상황 조사에 착수해 10월 15일부터 21일까지 다섯 차 례에 걸쳐 참살된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조사표를 <民國日報>에 발표하였다. 조사표는 피 해자의 성명, 본적, 피해 시간과 지점, 피해 정형 등을 상세히 밝힌 한 편 일본이 칼이나 철퇴 등 흉기를 이용해 중국인 노동자를 살해하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중국인 노동자들이 상하이로 돌아온 후 가장 먼저 구제사업을 펼친 기관이 바로 동향회 이다. 동향회는 安頓에서 중국인 노동자를 구제하는 동시에 정부와 사회 각계를 향해 중국 인 노동자를 위한 정의를 보여줄 것을 호소하였다. 10월 18일 동향회는 비밀리에 조사하여 증거를 모으는 한편, 베이양 정부에 전보를 보내 수백 명의 중국인 노동자의 피살 정형을 보고하고, 외교부에 일본 정부와 엄중히 이 사건을 교섭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동향회가 피해중국인 노동자를 돕는 한편, 甄海道尹이 이를 엄밀히 조사하여 세 차례에 나눠 외교부 에 612명의 원저우 중국인 노동자 피해조사표를 제출함으로써 외교부가 계속해서 일본 정 부에 항의하는 한편 사과와 배상에 대해 요구할 것을 촉구하였다.

중국 내 여론의 압박으로 베이양 정부는 10월 20일 정식으로 일본 정부에 항의하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시종일관 이를 부인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외교채널을 통해 교섭을 도하였으나, 약소국의 외교력은 한계가 있었으므로 중국 정부의 요구는 일본 정부의 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국인 학살사건이 점차 중일 긴 외교 문제로 비화하자 11월 7일 山本總理, 后藤 新平內務大臣, 伊集院彦吉外務大臣, 平沼駐一郎司法大臣, 田中義一陸軍大臣이 대신회의 를 소집한 후 오시마마치사건과 왕시텐사건을 철저히 은폐하기로 결정하였다.

2) 중국민간종교인조사단

중국 내의 격앙된 성토여론을 가라앉히기 위해 상하이의 東方通信社의 水野梅曉語는 종교인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일본에 파견해 조사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일본외무성에 정 보를 제공하는 일을 맡고 있던 미즈노였기에, 그가 이끄는 조사단이 진상에 대한 규명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923년 11월 15일 중국민간종교인조사단체이 도쿄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즉시 외무대 신, 경시충감, 육군대신, 내무대신, 사법대신 등을 방문하고 학살사건 관련 정황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사전에 입을 맞춘 일본의 변명에 불과했다. 즉 지진 후의 혼란한 상황에서 중국인 노동자를 오인하여 살해한 개별사건이라는 주장뿐이었으며 왕시텐의 행방 역시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대표단은 또한 학살발생지인 오시마마치와 요코하 마를 직접 시찰하였다. 일본이 이미 중거들을 모두 불태워 일본인 木戶四郎와 생존 중국인 노동자 金寶山의 증언을 들었음에도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 이에 시찰은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3) 북양정부조사단

1923년 11월 6일 베이양 정부는 전문적으로 사람을 일본에 파견해 진상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조사단은 왕정팅, 柳彦, 沈其昌으로 구성되었으며, 28 그 가운데 션지창은 일본에 가기 전 상하이에 머물며 왕자오청, 동향회, 영파동향회(후被同鄉會)의 대표 등을 만나 관련 자 료들을 수집하는 등 사전 준비작업을 진행하였다. 조사단은 12월 7일 도쿄에 도착한 후 즉시 조사 작업을 시작하였다. 왕정팅은 도쿄어 머 무는 동안 수상, 내무대신, 사법대신, 외무대신, 육군대신 등을 만나 중국인 노동자 학살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엄중한 조사를 요구하였으나, 일본 정부는 사전에 준비해 놓은 비망 록에 따라 학살사건 일체를 부인하였다. 이와 동시에 왕정팅은 중국 유학생, 우호 일본 인사 등과 비밀리에 만나고 관련 중거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밖에도 조사단은 국제 신문기자협회가 개최한 환영회에 참석해 신문 학살사건을 보도해 정의를 실현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각 단체가 주최하는 희생된 중국인 노동자와 왕시텐 추도회에도 참석하였다.

학살사건을 조사하는 것 외에도 중러관계 등 또한 왕정팅이 일본을 방문한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 2주간의 짧은 시간 안에 이처럼 중대하고 복잡한 사안들을 처리해야 했으며, 일 본 정부는 시종일관 학살사건을 부인하고 있었다. 조사단이 더욱 유력한 중거를 제시하지 못하자 일본의 이 같은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중국 정부의 정식 조사는 기대 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비록 성과가 기대만큼은 아니었으나 중국 정부가 정식 외교수 단을 통해 중국인 학살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은 일정한 시대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술한 중국 국내 민간과 정부의 조사 활동 외에도 귀국한 유학생들이 조직한 催在留日 學生婦國團 역시 다방면으로 수집해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31 일본의 중국 유학생 들이 조성한 유일화교도실항의후원회(留日華僑居殺抗議後投食)외 중화유일학생수재동포 구원회(中華留日學生受灾同胞救濟會)가 항의, 추도 등의 활동을 전개하는 등 진상을 밝히 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이같이 당시 중일 양국 정국의 혼란으로 중국 정부가 철저한 규명을 하지 못하였고, 또 한 일본 정부의 은폐로 중국인학살문제는 진상 불명의 상태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의 큰 역사적 현안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70년대 중일 학 자와 민간 우호 인사 간의 끊임없는 노력에 힘입어 이 문제는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4. 1970년대 이후 중일 학자의 진상조사연구

중국인학살사건에 대해 가장 먼저 사료발굴을 시작한 것은 일본인 학자였다. 지진 발생 후 일본 민간의 학자들에 의해 진상 관련 조사가 시작되었다. 외무성 일등 번역관 출신의 小村俊三郎 기자는 학살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써 1923년 11월 7일 요미우리신문(讀資新聞) 에 발표함으로써 300여 명의 중국인이 학살을 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하지만 이 글 은 게재 전 일본 정부의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다. 金子洋文 역시 1924년 출판한 「다네마키 잡기(種時き雑記)- 가메이도의 순교자를 애도하기 위해(亀戸の殉難者を哀悼するために)」에서 중국인학살사건을 언급하였다.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일본 정부의 방해와 증거의 소멸로 인해 중국인학살사건은 점차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그러다 한국과 일본 학계가 1960년대부터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시작하면서 중국인학살사건에 관한 관심도 점차 다시 생겨났다. 하 지만, 단순히 이는 사실을 언급하는 데에만 그치고 말았다. 그러다 1970년대에 들어 중국인 학살과 관련된 학계의 전문연구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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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산하통곡(山河慟哭 특별호) 東瀛慘案 한국어 번역본 [사료가 말하는 1923년 간토대지진 중국인학살사건]의 내용을 부분 발췌한 것이다. 

사료가 말하는 1923년 간토대지진 중국인학살사건

1. 중국인학살사건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와 가나가와를 중심으로 간토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당시 지진에 살아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학살 피해자로서 명단이 남겨진 사람들 만으로도 750여 명, 실제로는 800명을 넘는 것으로 보이는 중국인이 계엄군, 경찰, 자경단으로 조직된 민중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중국인 피해자 명단은 있다.

피해를 당한 중국인에 대한 기록은, 귀국한 유학생 왕조징(王兆澄) 등에 의해 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생사, 피해상황, 가해자, 목격자, 재산피해상황 등이 상세하게 조사되어 방대한 명단 자료로 남아 있다. (3쪽)

중화민국 在日 인민 피해조사표(오른쪽), 부상조사표(왼쪽)
중화민국 在日 인민 피해조사표(오른쪽), 부상조사표(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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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국제법상 원칙은 국가 배상

1923 년 월 외무성 조약국 제 3 과는 외국의 가지 사례를 검토하여 '내란 또는 폭동에 의한 불법 행위에 대한 국가의 책임에 관한 국제법상 원칙 은 국 가 배상이다' 고 보고했다 · 중국 주재의 요시자와 (芳澤) 공사는 사건 그 자체의 존재는 피아 (중일) 가 모두 이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기에 새삼스 럽게 다투기에는 적절하지 않으며 나는 오히려 기회를 잡아 사건에 대한 해결을 계획하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 '상대방의 주장을 용인하고 피해자의 수와 금액 의 검토는 양국 조사 위원의 재정에 맡긴다' 등의 의견을 제의했다.

9) 일본 정부의 배상 결정 일본 정부 기요우라 게이고(淨浦奎吾) 내각은 1924년 5월 27일에 피해자에 대하여 20만엔(당시)을 책임지고 지출하기로 하였다.

 

10) 중일교섭과 그 중단

1925년 6월 6일, 그 달 12일 , 중국 외교 총장 심서린 (沈瑞麟) 과 일본 요 시자와 공사 사이에 교섭이 시작되었다. 1925년 6 월 두 차례 교섭이 있었으나 (사진 좌측은 중국 측의 교섭 자료 ) , "시국적 (時局) 요인 (일본 내각 경질 중 국의 각종 배상 안건에 대한 일괄적인 주장 등) 에 의해 중지되었다 그후 다시 교섭은 이뤄지지 않았고 오늘에 이르렀다" (1926 년 2월 19일 ~4월 23일 요시자와 공사 , 항자우 (杭州) 의 영사 대리와 시데하라 (幣原) 외무대신 사이 에 오고 간 교섭에 대한 전문 '기밀 469 ) (사진 우측 ) 라고 보고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가 ' 해결되지 않은 배상 안건 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1936 년 제68회 제국의회 설명 자료 (아래의 제4 항 ) 에서도 확인한 바가 있다 . (다만 '인원수'와 → '요구액 불명'에 대한 결정 사항은 밝히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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