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에 그려진 간토(관동)대지진에서 자행된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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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에 그려진 간토(관동)대지진에서 자행된 학살
  • 미디어기평 기자
  • 승인 2022.04.2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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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증언 전호암(全虎岩) / 도꾜조선대학교편(朝鮮大学校編) 「간토대진재 당시 조선인 학살의 진상과 실태」(関東大震災における朝鮮人虐殺の真相と実態), 조선대학교, 1963년

전호암(全虎岩)의 학살상황 증언

- (조선대학교편(朝鮮大学校編) 「간토대진재 당시 조선인 학살의 진상과 실태」(関東大震災における朝鮮人虐殺の真相と実態), 조선대학교, 1963년)

저는 가메이도(亀戸)의 후쿠시마(福島) 사포(鑢, 야스리, 샌드페이퍼) 공장에서 직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다이쇼 11년(1922) 난카츠노동조합(南葛労働組合)의 가메이도 지부가 결성되어 거기서 활동을 했습니다.

(중략, 2일 밤)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가 다이너마이트를 훔쳐 집단으로 도쿄를 향해 습격해 올테니 모두 마을을 자위(自衛)해야 한다는 말을 하더군요. (중략)

밤이 되어 조선인이 많이 도망간다고 해서 저는 근처에 있는 한바(飯場, 현장 노무자 합숙소-역자 주, 이후 합숙소)에 가 보았습니다. 합숙소 바로 옆에 연꽃 밭이 있었고, 철도공사에 종사하고 있던 동포가 20명 정도 있었습니다. 가보니 흑룡회(黒竜会) 패거리들이 일본도(日本刀) 등을 들고 합숙소를 습격하여 연꽃 늪 속으로 도망친 이들까지 쫓아가 일본도로 베어 죽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겁에 질려 그 자리를 피했지만 학살은 3일 새벽까지 계속되었고, 그 중 여성 1명을 포함한 3명은 겨우 도망쳐 가메이도 경찰서에 수용되었습니다. 나는 나중에 이 사람들을 만나 학살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조선인 살해 소문이 심심찮게 전해졌습니다. 공장 사람들은 저에게 밖에 나가면 위험하니 집 안에 있으라면서 억지로 밀어 넣은 뒤 밖에서 망까지 봐주었습니다.

다음날(3일) 점심 때 쯤이 되어서야 이대로 있으면 여전히 위험하였고, 경찰이 조선인들을 수용하기 시작하기도 했으니까 그곳으로 가는게 안전하다고 해서 공장 친구들 십여 명이 저를 둘러싼 채 가메이도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거리에 나와 보니 도로 양쪽에는 무장한 자경단들이 즐비했고 군인들이 출동해 있어 험악한 분위기로 가득차 있었어요. 그리고 연행되는 동포들이 길에서 죽창 등에 찔려 죽은 시체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습니다. 저도 몇 번인가 습격을 당했습니다만, 오후 3시 경에 겨우 가메이도 경찰서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중략) 4일 새벽 3시경, 아래층 통로에서 두 발의 총성이 들렸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보초를 서고 있던 순경들의 대화에서 난카츠노동조합 간부를 모두 체포해 와서 우선 2명을 총살했다, 그런데 민가가 근처에 있으므로 총소리가 들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나머지는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략) 아침이 되어 참을 수 없게 되어 변소에 갔습니다. 변소 통로 양쪽에는 이미 30-40구의 시신이 쌓여 있었습니다.

(중략) 학살은 4일에도 하루 종일 계속되었습니다. 눈을 가린 채 벌거벗은 상태인 동포를 일으켜 세워 권총을 든 병사의 구령 하에 총검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쓰러진 시체는 옆에 있던 다른 병력이 와서 쌓아가는 것을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4일 밤에는 비가 계속 내렸지만 학살은 여전히 자행되어 5일 밤까지 이어졌습니다. (중략)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학살된 것은 제가 실제로 본 것만 해도 50-60명에 달했다고 생각합니다. 학살된 사람의 총 인원은 엄청난 수에 달했다고 생각됩니다.

학살은 5일 한밤중이 되어서야 멈췄어요. 순경이 전한 말로부터 들은 것입니다만 ‘국제적십자' 그 밖의 조사단이 온다는 것이 학살을 그만 둔 이유였습니다. 6일 저녁부터 바로 옆 소방서 차량 2대가 수차례 왕복하여 학살한 시신을 아라카와(荒川) 요쓰기바시(四ツ木橋) 옆으로 옮겼습니다. 나중에 난카츠의 유족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시체는 다리 옆에 쌓아 놓고(시체의 산더미 두 개) 휘발유를 부어 태운 뒤 그대로 묻었다고 합니다. 그 후 저는 유족에게 이끌려 현장으로 가서 시신을 묻은 흔적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시신을 수습한 뒤 경찰서 안은 깨끗이 청소되었고,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는 물로 씻어내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위장됐습니다. 조사단이 온 것은 7일 오전 중이었습니다.

(중략) 당시 아라카와 강둑 공사로 요쓰기바시(四ツ木橋) 근처에는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가 아주 많았습니다. 이것은 제가 실제로 본 것이 아니라 지진 직후 나라시노(習志野)에서 온 기병대가 다리 밑에서 동포들(조선인)을 기관총으로 학살했다는 것을 실제로 본 사람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 외에, 가메이도 남쪽의 오지마(大島) 부근에는 중소기업이 많이 있어 많은 조선인 직공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중 상당수도 기병대와 자경단에게 학살당했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아 가메이도 경찰서로 도망친 사람도 있었습니다.

 

번역 -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 한일번역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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