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래의 간토취재 ㅣ 1화 "일본을 벌하라, 나는 죄가 없다" 예순 두군데나 찔린 조선인이 남긴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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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래의 간토취재 ㅣ 1화 "일본을 벌하라, 나는 죄가 없다" 예순 두군데나 찔린 조선인이 남긴 유언
  • 민병래 작가
  • 승인 2023.12.27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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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 조선인 학살 진상규명과 공식사죄를 요구하는 김종수 목사] ① 운명처럼 만난 학살의 목격자

조선인 엿장수 구학영은 사이타마현 요리이경찰서 안에서 죽창에 찔려 죽었다. 26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1921년 요리이 마을에 들어갔던 그는 마시타야 여관에서 살며 엿을 팔았고 마을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다.

운명의 날은 1923년 9월 1일. 도쿄를 휩쓴 대지진과 함께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이 사이타마현을 덮쳤다. 3일 아침에는 군서기가 "조선인의 난동이 있으니 대비하라"는 정부의 전보를 요리이역 앞에서 낭독했다. 그러자 마을마다 자경단이 만들어져 조선인을 죽이려 들었다.
구학영은 가까운 쇼주인(正寿院) 절에 숨었다가 경찰서가 더 안전할 것 같아 제 발로 찾아갔다. 그런데 수백 명이나 되는 요도무라 마을의 자경단원들이 경찰서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유치장 안에 있는 구학영을 보고 죽창을 찔러댔다.

구석을 파고들며 이리저리 피해보았지만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나왔다. 구학영은 "죽어라!"라는 악다구니 속에서 바닥의 피를 모아 "罰 日本 無罪"(일본을 벌하라 나는 죄가 없다)라고 썼다. 그는 예순 두군 데나 찔리고 베인 채 숨지고 말았다. 

간토대학살로 숨진 조선인은 6661명. 그러나 일본정부가 학살을 부인하고 시체를 불에 태우거나 강물에 흘려 보내 어디서 온 누구인지 대부분 알 수가 없다. 구학영은 드물게 나이와 이름, 고향이 밝혀진 경우다.

울산이 고향인 그의 집은 동양척식주식회사에게 땅을 빼앗겼다. 농사를 지으면 소작료로 8할이나 벗겨 먹는 통에 아버지는 북간도로 떠났고 구학영도 일본으로 왔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김종수 목사는 <엿장수 구학영>이란 제목으로 이 사연을 2021년 3월 책으로 만들었다. 그는 지금 목회 활동이 아닌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 역사관' 대표 역할에 온 힘을 쏟고 있다.

김종수는 학살 100주년이 되는 2023년 이전까지 일본정부에게는 공식인정과 사죄를, 한국정부에게는 '간토 조선인 학살' 관련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가 20년 가까이 매달려온 일이다.

운명처럼 만난 간토 조선인 학살 증언자
 

▲ 4~50대 20년을 간토대학살 진상규명에 매달린 김종수대표 천안 아우내 동산에서 그를 만났다. ⓒ 민병래

 
김종수는 2006년 '아힘나'(아이들의 힘으로 만들어 가는 나라) 평화캠프를 도쿄에서 주최할 때 강연자로 온 야끼가야타에코 할머니를 만났다. 그녀는 "열 살 때인 1923년 조선인 청년이 공동묘지로 끌려가 소나무에 묶였습니다. 눈이 가려지고 총살될 때 '아이고, 아이고' 했지요. 너무 가슴이 아파 울면서 집으로 돌아 갔어요"라고 그때 기억을 들려줬다.

그녀는 일본 전역에서 조선인학살을 증언해왔는데 이 강연은 김종수를 사로잡았다. 사실 그는 간토라는 지역이 어딘지도 몰랐고 모두 유언비어에서 비롯된 일로만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 김종수의 관심은 온통 '간토 조선인 학살' 문제였다.

2007년 5월, 도쿄 신주쿠 고려박물관에서 '간토 학살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생생한 진실을 담은 사진들에 넋을 잃었다. 김종수는 박물관장 송부자에게 "한국에서 전시할 테니 이 전시물을 빌려달라"고 떼를 썼다. 박물관 이사회는 듣도 보도 못한 김종수였지만 긴 회의 끝에 그의 진정성을 믿고 대여를 결정했다.

김종수는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한 의원모임(대표간사 유기홍 의원)'의 도움으로 2007년 9월 국회에서 '간토 학살 전시회'와 간토 조선인 학살 연구자인 재일교포 강덕상 교수의 강연회를 열었다. 이 행사가 계기가 되어 2007년 11월, 도쿄에서 '간토조선인 학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한일재일시민연대'(아래 시민연대)가 결성되었고 김종수는 한국대표를 맡았다.

이후 그와 '시민연대'는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알려나가는 데 모든 정성을 기울였다. 김종수와 시민연대가 특히 주목한 것은 이 사건을 대한 일본정부의 태도다. 

일본민중의 불만을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돌린 일본내각
 

▲ 쇼주인절에 모셔져 있는 구학영의 유해와 추모비 구학영은 드물게 나이, 이름, 고향이 밝혀진 조선인 피해자다. ⓒ 김종수제공

 
1923년 9월 1일 지진으로 수십만의 이재민이 황궁 앞 광장까지 메우자 일본 내각은 몇 해 전 쌀값 폭등 때 일어난 민중의 저항이 떠올랐다. 불안과 굶주림에 떨고 있는 민중들의 불만이 천황에게 향할까 두려웠다.

또 3·1운동과 같은 투쟁이 조선인 노동자들 내에서 터져 나오지 않을까 머리를 싸맸다. 일본 정부는 재빨리 이재민의 절망을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돌렸다. "조선인이 공격해 온다"는 유언비어를 근거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병력을 전개했다. "폭동을 일으킨 조선인을 진압하라"는 지시에 실탄까지 지급 받은 군대의 살육행위는 거침이 없었다.

'야중포 제1연대'의 이와나미소위와 병사 69명은 고마쓰가와에 가서 조선인 노동자 200명을 참살했다. 부녀자들은 발을 잡아당겨 가랑이를 찢었고 철사줄로 묶어서 연못에 던졌다. 이 끔찍한 사실은 공훈조서와 당시 1연대 제 6중대의 병사였던 구보노시게지의 일기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같은 연대 3중대장이었던 엔도사부로대위(후일 육군중장)는 "병사들이 조선인을 한사람이라도 더 죽이면 나라를 위하는 것이니 훈장이라도 받을까 기대했다. 이를 살인죄로 다스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책임은 그런 생각을 갖게끔 한 자에게 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런데도 일본정부는 간토 조선인 대학살에 대해 재해 과정에서 빚어진, 일본인도 희생된 우연한 일이라 주장했다. 김종수와 '시민연대'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정부가 주도한 학살'임을 알리는 데 집중했다.
 

▲ 신주쿠역에서 김종수 2009년 8월 조선인 피해자의 추도비를 준비해 학살터를 돌아다녔다 ⓒ 김종수제공

 
그런 노력이 바탕이 되어 일본의 활동가들은 2010년 9월 24일 일본내 단체들을 모아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을 발족했다. 이 모임은 꾸준히 일본 총리에게 학살의 국가책임 인정 여부를 묻고 있다.  

일본정부가 학살을 주도한 증거는 차고 넘친다. 9월 3일 내무성경보국장 고토후미오는 각 지방장관에게 "도쿄지진을 이용, 조선인들이 각지에 방화하고 불령의 목적을 수행하려고 하니 조선인의 행동에 대하여 한층 더 엄밀히 단속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이렇게 정부조직 망을 타고 '조선인 방화, 독약 살포, 강도, 집단습격'의 유언비어는 도쿄, 요코하마, 사이타마 등 간토 지방 전역에 퍼져나갔다. 그 후 수많은 자경단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김종수는 이런 진실을 접하며 큰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우리 정부는 "일본정부에게 조선인들의 희생에 대해 조사하고 진상을 밝혀달라"는 요구를 왜 한 번도 못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가 추진한 것이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관한 특별법이었다.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2013년 국회에서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했다. 다행히 그해 유기홍 의원이 여야의원 103명의 서명을 받아 대표 발의를 했다. 뭔가 희망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본 회의에 오르지도 못하고 폐기가 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접한 김종수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게 진정 대한민국 국회란 말인가?

- 2편 최소 6600여명의 학살... 일본 의원도 나섰는데 우리 의원은 왜 말이 없나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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