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지구에서의 간토학살 1100증언기록 연재(1)
- はじめに― 証言集を作るまで - 遺骨の発掘を試みる
유골의 발굴을 시도하다
자료발굴 - 西崎雅夫, 번역 - 조영석 / 번역팀 공동수정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관동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동경만 해도 사망자가 6 만명 이상이 나왔다. 15시가 넘어서자 "사회주의자 및 조선인의 방화가 많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으며, 야밤중이 되자 스미다구(墨田区)의 요츠기(四ツ木) 다리 등에서 조선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 사건의 대부분은 정부에 의해 은폐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진상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1982년 7월, "관동 대지진 때에 학살 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여 위령(慰霊)하는 모임 / 준비위원회"가 발족하였으며, 9월에는 아라카와(荒川) 하천 부지에서 유골을 시굴(試掘)하였다. 그때, 나는 대학 4학년이었다. 이 모임의 사무국 일원으로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천 부지를 뛰어 다녔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시굴은 3일 동안 하천 부지 세 곳을 발굴하는 것이었는데 "당일에 다시 묻어야 한다"는 엄격한 조건으로 인하여 결국 유골을 찾을 수 없었다. 여기서부터 이 모임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 모임의 결성을 호소한 것은 고(故) 키누타(絹田幸恵)였다. 그는 아다치구(足立区) 이코(伊興)소학교의 교사였는데, 수업시간에 아라카와(荒川) 방수로에 대한 역사를 가르쳤다. 그때, 한 학생이 "선생님, 그렇게 큰 강을 사람들의 손으로 팠다니 믿을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자신의 교수법이 불충분하다고 느낀 그녀는 스스로 아라카와 방수로 굴착공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공사에 관련된 다양한 문헌을 조사함과 동시에 당시를 기억하는 주변 유역의 노인들에게도 증언을 듣고, 기록하였다. 1970년대 후반의 일이다.
"여름방학이 되면 항상 햇볕에 까맣게 타면서 매일 나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자기 스스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어느 날 제가 "매일 뭐하고 다녀요?" 라고 물어보자, "아라카와 방수로 이야기를 듣고 다닌다"라고 대답했다"는 말을 그녀의 딸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날 키누타(絹田)선생은 동경도 북구의 이와부치(岩淵)에서 동경만(東京湾)까지 이어지는 아라카와 방수로의 중간지역에 가까운 스미다구(墨田区) 야히로(八広) 주변에서 조선인 학살에 대한 목격 증언을 들었다. 수 많은 조선인들이 살해되었는데, 그 유골들이 지금도 하천 부지에 매장 된 상태로 남아 있다는 증언이었다. 그녀는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하여 시민들에게 공개적으로 호소했다.
1982년에 "관동대지진 때에 학살 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고 위령하는 모임(나중에 '추도하는 모임 / 추도회'으로 개칭)"을 결성한 후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증언을 듣고 기록을 수집하였으며, 한국에서도 조사하면서 매년 9월에 하천에서 추도식을 거행 해 왔다.
1992년에 간행 된 『바람이여, 봉선화 노래를 옮겨라』(교육사료 출판회)에서는 그때까지 수집했던 많은 증언(총 150명)과 문헌 사료(史料)들을 정리했다. 그 중에서 "스미다구 북부에서는 관동대지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해명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당시의 신문을 통하여 하천 부지에 묻혀 있었던 조선인 시신들이 경찰에 의해 비밀리에 발굴되어 이송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것도 두 차례에 걸쳐서였다(1923년 11월 12일, 14일). 그때부터 우리는 모임의 목표 중 하나였던 '유골의 발굴'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현장에 추모비를 세운다"는 것이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경찰에 의한 유골 발굴은 일본 정부의 방침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선 총독부 경무국 문서인 "대지진 당시에 있어서 부정(不逞:불량)한 조선인의 행동 및 피살 조선인의 숫자에 대한 처리(処置)"에 그 방침이 기록되어 있다. "기소 당한 사건으로 조선인에게 피해가 있는 것은 즉시 그 유골을 불명(不明)할 정도로 처치(始末)할 것." 이러한 일본 정부의 방침에 의해서 아라카와 하천 부지의 조선인들의 유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처리"되어 버린 것이다. (금병동,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문제 관련 사료 - 조선인 학살에 대한 식민지의 반응", 녹음오방, 1996년에 수록)
遺骨の発掘を試みる ある日絹田は、北区岩淵から東京湾まで続く荒川放水路のほぼ真ん中、墨田区八広のあたりで、朝鮮人虐殺の目撃証言を聞いた。多くの朝鮮人が殺され、その遺骨が今も河川敷に埋められたままになっているという話だった。とてもそのまま放っておくことはできないと考えた絹田は、広く市民に呼びかけ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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